2012년 6월 11일 월요일

평화주의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릐 아이기어와 발명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500년도 더 전에 잠수함, 글라이더, 탱크를 발명했다. 그런데 최초의 잠수함은 1620년에 만들어졌고, 사람이 최초로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난 것은 1849년, 최초의 탱크가 사용된 것은 1910년대였다.
다빈치의 발명품은 대부분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수백 년 뒤에 다시 발명해야 했다. 그 이유는 다빈치가 르네상스 시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중세가 끝나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문화 혁명 운동으로, 특히 뛰어난 사상과 아이디어가 많이 담겨 있는 고대 그리스의 문헌을 되살려 자세히 연구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함께 예술과 과학이 크게 발전했다. 진정한 르네상스 인이 되려면 과학자나 작가 혹은 김연아 선수처럼 어느 한 분야만 파고드는 전문가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대신에 여러 방면에 두루 통달한 팔방미인이 되어야
비록 그렇게 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다빈치는 해냈다. 그는 역사상 위대한 화가일뿐 아니라, 지도도 만들고, 조각도 만들었으며, 별을 관측하고, 작곡도 하고, 자신이 발명하고 직접 만든 악기로 음악도 연주했으며, 암석을 연구하고, 건물과 도시도 설계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시체를 갈랐다.
또한 다빈치는 아주 잘생겼고, 체격도 좋았으며, 시력도 좋았다. 그리고 힘도 아주 셌는데, 한 손으로 편자(말굽에 대는 U자 보양의 쇳조각)를 구부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또 마음도 아주 따뜻한 남자였다. 채식주의자였던 그는 새장에 갇힌 새를 사서 놓아 주기도 했다.

물론 그는 발명가였다.
르네상스 인으로 살아가려면 무척 바빴을 것이다. 다빈치는 많은 것을 공책에 기록했는데, 그 중에는 놀라운 아이디어와 훌륭한 그림이 아주 많지만,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거나 출판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 가거나, 그런 아이디어를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데 이용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사는 곳을 자주 옮겼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가 발명한 것은 대부분 자기 혼자만 알고 있었다. 다빈치가 죽은 뒤, 그가 기록한 종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것들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대부분 화가였다. 그래서 다빈치가 한 연구 가운데 과학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무시되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는데, 다빈치에 관한 책은 미술만 다루는 경우가 많다. 만약 다빈치가 살아 있다면, 이런 대접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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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는 1452년에 이탈리아 코스카나 지방의 빈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삶은 알려진 게 별로 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사회가 매우 불안정했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를 중심으로 한 다섯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 지역은 부유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가문이 통치했다. 다빈치는 그 중에서 보르자 가와 메디치 가에 들어가 일했다. 지배자들은 대체로 잔인했지만, 그래도 미술을 크게 장려했다.


<그리스도의 세례>부분,
왼쪽 천사의얼굴이 다빈치가 그린것.


그들은 그들끼리 싸울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이나 프랑스하고도 자주 전쟁을 했기 때문에 전쟁 무기를 만드는 사람을 우대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다빈치는 큰 환영을 받았다.

처음에 다빈치는 과학보다는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1469년, 다빈치는 유명한 화가이던 베로키오 밑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어느날 베로키오가 그리던 초상화 ('그리스도의 세례')중 한 인물의 머리를 다빈치가 대신 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본 베로키오는 "난 이제 은퇴해야겠다" 말했다고 한다.

다빈치가 위대한 화가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바위와 물, 동물, 사람 등을 그렸는데, 한번은 괴물을 그려 캄캄한 방에 놓아 두고 거기에 불빛을 비추어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한적도 있었다.


다빈치는 동성애자였는데, 그 당시 동성애는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잘못하면 화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1476년에 그는 동성애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비록 무혐의 처분을 받아 풀려나긴 했지만, 이것은 얼마 후 다빈치가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가기로 마음먹은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 무렵에 다빈치는 이미 과학과 공학에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밀라노의 통치자이던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발명할 수 있는 것들을 열거했다. 그 중에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다리와 투석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림도 잘 그린다고 언급했다. 그러자 1482년에 스포르차는 다빈치를 고용했는데 다빈치가 맡은 일은 리라(하프 비슷한 현악기)연주였다. 다행히 다빈치는 리라 연주로 할 줄 알았다.

리라 연주자의 일자리를 얻었다고 해서 발명을 그만둔 건 아니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이긴 했지만, 다양한 전쟁 무기를 구상했다.


증기의 힘으로 발사하는 대포




낫이 달린 전차



탱크
거대한 석궁


그렇지만 이것들 중에서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거의 없다. 어떤 것은 시대를 너무 앞서서, 어떤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어떤 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어떤 것은 보기만 해도 너무 괴상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탱크는 특히 괴상했는데, 그 바퀴들이 반대 방향으로 돌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다빈치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 가는 사람들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그랬을까? 아니면 단순히 실수였거나 장난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발명이 그렇듯이, 다빈치가 생각한 것이 모두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증기의 힘으로 발사되는 대포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보이는데도, 그는 아르키메데스의 아이디어를 빌린 것이라고 말했다.
다빈치가 남긴 기록에서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글씨를 거울에 비친 모양으로 썼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훔쳐 가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냥 거울에 비춰 보기만 하면 해독이 가능한데, 굳이 그렇게 어려운 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빈치가 왼손잡이라서 그렇게 썼다고 말하지만, 이것 역시 의심스럽다. 그 진실은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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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빈치의 발명은 모두 아이디어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세부적인 것까지 꼼꼼하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토대가 되는 과학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480년대에 다빈치는 죽은 동물, 특히 새들을 해부하여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다빈치는 또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낙하산은 다빈치의 많은 발명과 마찬가지로 아이디어만으로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쓸 수 있을 만큼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헬리콥터 설계는 다빈치가 한 발명 중에서 훗날 실제로 그 발명에 영향을 미친 몇 안 되는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다빈치의 헬리콥터 설계는 1940년대에 이고르 시코르스키가 그것에서 영감을 얻어 최초의 헬리콥터를 만들 때까지 수백 년 동안 잊혀져 있었다. 그런데 헬리콥터는 다빈치가 맨 먼저 생각한 게 아니다. 이미 1325년에 장난감 헬리콥터가 나왔는데, 그것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양수기가 아니라 풍차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만약 다빈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모형을 만들었더라면, 그것은 세계 최초로 자체 동력을 갖춘 비행 기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낙하산과 마찬가지로 그 헬리콥터도 실제로 타고 나는 데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동체가 공중에서 프로펠러가 도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헬리콥터도 꼬리에 프로펠러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빙글빙글 돌 것이다.



다빈치는 헬리콥터와 낙하산 스케치는 딱 하나씩만 그렸지만, 다른 비행 기계는 아주 많이 그렸다. 그것들은 대부분 새처럼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것이었다.

다빈치는 어떤 것을 발명할 때 대개 과학적 원리를 깊이 따졌지만, 비행에 대해 생각할때에는 거기에 홀딱 빠져 다소 비현실적인 공상을 하곤 했다. 예를 들면, 노 대신에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배 같은 것을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비행 기계 중에서 가장 현실성이 있는 것은 동력원이 전혀 없이 글라이더처럼 나는 것이었지만, 다빈치는 그것을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방법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다빈치가 그 중 한두 가지를 실제로 만들어 시험해 보았다고 말한다.

이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온갖 잡동사니를 다 합치면 그 무게가 약 300kg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이 무거운 기계를 오로지 사람이 바퀴를 돌리고 페달을 밟는 힘으로 하늘을 날아야 한다면 손바닥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아주 빨리 손발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다빈치의 비행 기계는 하늘을 날 가망이 전혀 없었다. 다빈치가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는 쓸 만한 동력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동기나 가솔린 엔진, 연료 전지 같은 게 전혀 없었으니까. 쓸 수 있는 동력원이라곤 사람의 근육과 말의 힘과 증기의 힘뿐 이었다. 몇몇 발명품은 강물의 힘을 끌어다 쓰긴 했지만, 강물의 힘을 비행 기계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말의 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빈치는 비행 기계를 추진하는 방법을 한 가지 고안했는데, 그것은 아주 엉뚱한 생각이었다.
파일럿이 바퀴를 돌려 석궁처럼 아주 강한 활을 잡아당겼다가 놓을 때 발생하는 힘으로 날개를 퍼덕인다는 아이디어였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파일럿이 아주 빨리 활을 다시 잡아당기지 않으면, 기계는 추락하고 말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다빈치가 새를 연구하긴 했지만, 새가 하늘을 나는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새가 마리 사람이 평영을 하듯이 날개를 아래와 뒤로 퍼덕임으로써 하늘을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그래서 설사 쓸 만한 동력원이 있었다 하더라도, 다빈치의 비행 기계는 하늘을 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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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는 밀라노에서 무기와 비행 기계를 설계하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살 수도 있었다. 1499년에 프랑스가 밀라노를 공격해 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그래서 베네치아로 피신했지만,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빈치는 이 무기들을 비행 기계만큼 열심히 연구했다. 비록 이 중 실제로 만들어져 쓰인 것은 하나도 없지만, 얼마 후 다빈치는 베네치아의 통치자인 체사레 보르자 밑에서 정식으로 일하게 되어 그와 함께 여행을 다녔다. 그 당시에는 잔인한 통치자들이 많았지만, 체사레 보르자는 그 중에서 특히 잔인했다. 다빈치는 그것을 잠깐 동안 눈감아 주기로 마음먹었지만, 체사레가 반역을 꾀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것처럼 위장하여 식사에 초대한 뒤에 모두 목졸라 죽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다빈치는 피렌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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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년 무렵에 다빈치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렸다. 그러고 나서 4년 뒤에 다시 밀라노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밀라노를 점령해 통치하던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초청을 받아 갔다.

다빈치는 발명뿐만 아니라 사물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다빈치는 사람을 해부하여 인체에서 기계 비슷한 성질을 찾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심장을 연구하는 데에는 약간 문제가 있었다. 심장은 일단 몸 밖으로 꺼내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물컹물컹한 덩어리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빈치는 시체의 심장에 밀랍을 집어넣어 그것을 딱딱한 틀로 만든 뒤 소석고로 본을 떴다. 그는 심장을 아주 자세하게 그림으로 그렸지만, 심장의 기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또다시 전쟁이 다빈치의 연구를 방해했다. 1512년에 프랑스가 밀라노에서 물러나자, 다빈치는 또다시 옮겨 갈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이번에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 갔다. 줄리아노는 다빈치에게 작업장을 마련해 주고 조수들도 붙여 주었다.



나사깎는 기계

그렇지만 다빈치는 조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 간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수들은 새들도 죽여 다빈치를 분노케 했다. 그렇지만 이 무렵에 다빈치가 발명한 것 중에서 무기가 아니고, 실제로 사용된 것들이 일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나사 깎는 기계였는데, 그 뒤 약 400년 동안 계속 쓰였다. 또 자동으로 무게를 재는 장치, 새로운 종류의 물시계, 습도계도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모두 시대를 너무 앞선 것이었다.
이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은 1515년에 루이 12세가 죽으면서 끝났다. 정력적이고 젊은 후계자인 프랑수아 1세는 루이 12세가 잃었던 이탈리아 땅을 되찾고, 볼로냐에서 레오 10세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다빈치는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가슴을 열고는 백합이 가득 든 가슴 속을 보여주는 사자'를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이 사자의 작동 원리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일종의 자동 기계, 곧, 시계 장치 같은 것으로 움직이는 로봇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다빈치가 만든 로봇 비슷한 발명품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혼자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갑옷도 만들었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무척 놀랐을 것이다.



사자로봇과 갑옷로봇


1516년, 다빈치는 마지막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밑에서 일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여기서 그는 분수와 홀이 가득 찬 조립식 성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성에는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화장실도 있었다.
다빈치는 비행에 대한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말년에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또 하나 떠올렸다.
동력원이 전혀 필요 없는 다빈치의 행글라이더는 실제로 하늘을 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빈치는 너무 늙어 그것을 개발할 힘이 없었다. 결국 1519년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이디어와 발명은 세상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도 있었지만, 그가 한 모든 연구는 약200년 동안 잊혀진채 묻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가운데 3분의 2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비록 사람의 창의력은 다양한 발명을 하고, 같은 목적에 쓰이는 기계도 다양한 것들을 발명하지만,자연보다 더 아름답고 적절하고 직접적인 발명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발명에는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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